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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CTS
작성일시 : 2010-08-16
조회 :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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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기획, '믿음의 유산 보존하자' 시간입니다. 나환자촌으로 유명한 애양원, 이 애양원이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된 것을 알고 계십니까? 100년 전 호남지역 선교사로 온 윌슨과 쉐핑 선교사는 나환자들을 돌보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 생애로 보여줬는데요. 지난 시간 광주 양림동 유적지에 이어 오늘은 선교사들의 헌신적 삶을 조명했습니다. 박새롬 기잡니다. -------------------------------------------- 1900년대 초 천형으로 여겨지던 한센병 환자는 무려 2만명, 나라조차 이들을 구제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남장로교 출신으로 제중병원장을 역임한 윌슨 선교사는 1909년 광주 봉선리에 움막을 짓고 거리에 버려진 나환자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주민들의 반대로 시설을 여수로 옮기면서 무려 730명의 환자를 수용했고 이는 애양원의 시초가 됐습니다. 윌슨은 한센병을 치료하는 약품을 계발하는가 하면, 수공업 기술을 가르치며 자활의지를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환자들 가운데 인재를 양성해 의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송인동 교수/ 호남신학대학교 윌슨 뒤에는 간호사 쉐핑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1912년 미혼의 몸으로 한국에 온 쉐핑은 간호학계를 창립하고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나환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며 애양원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또 고아 13명을 자신의 딸로 입양하고 한센병 환아를 아들로 삼았습니다. 애양원은 1932년 쉐핑 선교사의 조선성역 20주년을 기리는 비를 세웠고, 2년 뒤인 1934년 병환으로 죽음을 맞이한 쉐핑을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몸을 의학발전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쉐핑 선교사 유언/ "호흡만 거두면 시체를 해부하여 연구 자료로 삼으십시오" 쉐핑의 장례는 수백명의 거지와 한센병자들의 통곡속에 12일 동안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cg2 당시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양 서거, 재생한 예수란 부제로 그녀의 죽음을 대서특필할 정도였습니다. 세상의 명예도,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았던 윌슨과 쉐핑선교사, 그 헌신적 섬김은 호남지역 복음화의 뿌리가 됐습니다. CTS박새롬입니다. |